지난 13일 제주공항. 붉은색 조끼에 어깨띠를 두른 노인 40명이 줄을 지어 공항을 빠져나옵니다.
호텔에서 여장을 푼 이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제주 4.3 평화공원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제주 4.3 사건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접고, 상생과 화합을 위해 건설됐습니다.
그러나 노인들이 이곳에 나타나면서 이날은 갈등과 반목의 장이 됐습니다.
“날조된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는 즉시 시정하라. 왜곡 과장 편향된 전시물은 즉시 제거하라.”
4.3 평화공원의 전시물이 왜곡되고 편향됐다고 외치는
이들은 단순한 단체 관광객들이 아닙니다. 이른바 예비역영관급장교연합회 소속 회원들입니다.
4.3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4.3은 폭도들에 대한 정당한 토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권오강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장]
“제주도의 잔당, 반도, 폭도, 토색, 강도, 요런 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탄압해서 법의 존엄성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돼 있어.”
이들은 또 정부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역사를 날조해 군인을 학살자로 몰아부쳐 군에 대한 증오감을 초래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당시 군은 통행이 필요한 제주도민들에게는 통행증을 줘 안전을 보장했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4.3 사건을 조사한 전문가들의 말을 다릅니다.
[박찬식 제주 4.3 조사단장]
“통행증 교부로 안전을 보장한다고 돼 있는데 이게 제대로 키져지지 않았어요. 군 당국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주 상당시 그 당시 과오다 잘못됐다. 소개령이라고 했지만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고 거의 초토화로 가버린거죠.”
하지만 이 단체 회원들은 4.3 사건 당시 군의 초토화 작전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권오강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장]
“이것도 작전 쓰면 안 돼. 초토화됐다. 초토화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 하지만 군에서 초토화 작전이란 군에서 초토화 세우는 게획을 세우고 작전명령을 하달해야 이게 작전이야.”
작전 당시 군이 ‘초토화’라는 말을 붙이지 않은 만큼 ‘초토화작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4.3 때 군인과 경찰은 강경 진압 작전을 펼쳐 제주도 중산간지역 마을 10개중 9개를 초토화시켰습니다. 당시 미군은 제주도민 10명중 한명꼴인 3만여 명이 희생됐다고 추산했습니다.
유족들은 이 단체의 선전 활동에 대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입니다.
[강동균 제주 강정마을 회장]
“영남동이라고 있어요. 강정에서 한라산 쪽으로 한 5킬로 떨어진 그 마을 전체가 없어졌어요. 군인과 경찰들이 와서 전부 초토화작전을 한거죠. 전부 불 태워버린거죠.”
다랑쉬굴. 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마을 근처 굴에 숨어있던 양민들이 안타깝게 떼죽음을 당한 곳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의 희생자들도 순수한 양민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권오강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장]
“굴 안에 있는 사람을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니까 질식사시켰다.”
(아홉 살난 어린이도 있고?)
“그건 맞아, 부녀자나 어린이들도.”
(양민이 죽은 것은 맞겠네요?)
“모르겠어. 그건 나도 모르겠고. 유골 옆에는 철모 대검 등이 있었다. 그 당시 무장대가 장비하던 물품이다. 그런 것은 여기에 싹 빠졌어 없어.”
이 단체 회원들은 4.3 사건의 역사를 바로 알리겠다며 제주를 찾은 관광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줍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주는 대로 받습니다.
[전현수 / 서울 송파중]
“참 나쁘죠 이 사람들.”
(어떤 사람이 나쁘죠?)
“북한사람들요. 4.3사건이 북한사람들 아니야.”
“4.3사건이 뭔데?”
“제주도 와서 사람들을 다 죽였잖아.”
“제주도까지 어떻게 내려와.”
하지만 제주에는 4.3 당시 군경의 양민학살이 얼마나 무자비했는가를 보여주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검은 돌로 둘러싸여 잡초가 무성한 이것은 무덤입니다. 변변한 봉분도 없이 초라합니다. 65년 전 제주 4.3 사건 당시 국군에게 학살당한 아이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애기무덤이라고 부릅니다.
4.3때 제주도민이 겪은 통한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주시 조천읍 너븐숭이 4.3 기념관.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 사망장소를 적은 검은 두루마리가 걸려있습니다. 400여 명의 희생자 중에는 서너 살에 불과했던 어린이들도 여럿 있습니다.
[고태선 문화관광해설사]
“그 애기들을 부모들과 함께 전부 총으로 쏴서 이렇게 총살한 겁니다.”
국무총리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이런 양민학살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예비역영관급 장교연합회 회원들은 제주 전역을 돌며 그들의 주장이 담긴 유인물을 배포했습니다. 주요 관광지를 지날 때면 버스에서 내려 관광도 즐깁니다.
이들이 뭘 주장하든 그건 표현의 자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선전활동과 관광에 정부 예산이 지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전행정부는 이들의 활동이 공익사업이라며 지난 2년간 1억 원이 넘는 국민의 세금을 지원했습니다.
이 단체가 역사를 바로 알리겠다며 지난해 국가보조금 7000만 원을 타낸 뒤 작성한 사업결과 보고서입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방문해 시민을 대상으로 홍보물을 배포하고, 이승복 기념관을 찾아가 캠페인을 벌이는데 예산을 사용했다는 내용입니다.
정부는 이들의 활동이 과거 역사에 대한 왜곡되고 편향된 시각을 바로잡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올해도 군인과 경찰이 4.3 때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오명을 벗도록 여론을 조성하라며 4500만 원의 세금을 또 지원했습니다.
[이소민 제주대 음악학과]
“우리가 낸 세금인데 정부 멋대로 그렇게 쓰면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박찬식 제주 4.3사건 조사단장]
“유족들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을 박아버리는 경우가 되는 건데, 유족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진짜 또다시 분노 이전에 슬픔이 오지 않을까...”
하얀 눈밭에 발자국이 선명합니다.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다 총에 맞아 죽은 변병생 모녀를 형상화한 동상입니다.
깔깔거리고 웃던 학생들도 이내 엄숙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처럼 제주 곳곳에 엄연히 남아있는 학살의 흔적을 부인하고, 오히려 반목과 갈등을 조장하는 사업에 국민의 혈세가 투입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주 4.3 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임이 이미 밝혀진 바 있습니다. 희생자의 고통과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기는커녕 이를 더욱 악화시키는 사업에 예산 지원을 지속한다면 정부가 앞장서 역사를 거스른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입니다.
뉴스타파 황일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