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헤드라인

마지막 한 시간의 기록...일사불란 어민,우왕좌왕 정부


1. 소식 듣고 현장까지, 신속했던 어민들


여객선 세월호 침몰 현장 인근에 있는 섬마을 관매도의 이장 고경준 씨.

그는 4월 16일 아침, 또 다른 섬 조도에 머물고 있었다.

볼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 씨가 한 지인의 전화를 받은 시각은 9시 5분

맹골수도 해역에서 큰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 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히 기억한다.




고 씨는 마음이 급해졌다.

볼일은 제쳐두고 여기 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로 인근 섬마을 주민들이었다. 


20여분 뒤. 해경이나 군청의 통보는 없었지만 사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고 씨는 관매도 어촌계장 고용민 씨에게 전화를 건다. 두 사람은 먼 친척 관계다.


이장 고씨는 한달음에 관매도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관매도와 조도는 배로 30여분 거리, 빨리 주민들에게 사실을 전달하는 게 급했다.


9시 30분. 어촌계장 고용민 씨는 당시, 항구 앞 작업장에서 주낙을 꿰고 있었다. 그는 이장의 전화를 받자마자 급히 마을회관으로 달려가서 한 쪽 구석 조그만 탁자 위에 놓여있던 마이크를 잡았다.

90여 가구가 사는 관매도에 어촌계장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여객선이 침몰하니 빨리 구조에 나서자는 외침이었다. 


그 때가 9시 32분쯤이었다.




방송을 들은 주민들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하던 일을 멈추고 부두로 달려갔다. 항구에 묶여있던 어선 여러 척이 방송 뒤 10분도 안 돼 사고 현장으로 떠났다. 






이처럼 조도에 있던 이장 고 씨가 해경 등 관공서가 아닌 지인의 전화를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한 후 관매도 어민들이 구조를 위해 바다로 나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사고 인근 섬 주민들은 대부분 이렇게 자발적으로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침몰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섬, 동거차도와 서거차도의 주민들도 사고 소식을 들은 각 마을 이장들이 방송으로 침몰 현장을 알리자 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2. 우왕좌왕, ‘골든타임’ 날린 정부


같은 날 아침 8시 52분 32초.

전남소방본부 119로 세월호에 탑승한 한 학생의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러나 119는 소방본부다. 해상에서 사고가 나면 정부의 체계상 해경에 전화해야 했다.


해경의 응급전화번호는 122. 그러나 이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전남소방본부는 응급전화를 받고 2분여가 흐른 뒤인 54분 38초해상 안전을 관할하는 해경 상황실로 전화를 넘긴다. 

 



해경상황실 : "여보세요.여기 목포 해경상황실입니다.지금 침몰중이라는데 위차가 어디예요.배가 어디 있습니까?"

학생 : "위치를 잘 모르겠어요. 지금 여기가."

해경상황실 : "위치를 잘 모르시겠다고요?거기 GPS 경위도 안 나오나요?경도와 위도?"
학생 : "어 어제 어제."
해경상황실 : "어제 출항하셨다구요?"
학생 : "어제 8시에 출발한 것 같아요."
해경상황실 : "배 이름이 뭡니까? 배 이름."
학생 : "세월호요.세월호."
해경상황실 : "세월호. 이게 상선인가요 뭔가요?"
학생 : "예?"
해경상황실 : "배 종류가 뭐예요? 여객선인가 아니면 어선인가요?"
학생 : "여객선"


8시 56분 51초. 전남지방경찰청 112신고센터로도 탑승객들의 전화가 잇따라 걸려왔다.


경  찰 : "배가 침몰 직전이라고요?"

신고자 : "예 예 세월호 세월호 인천에서 제주 들어오는거 인천에서 제주 들어오는거 빨리..."

          (알아 들을수 없는 외침)

신고자 : "움직이면 안 된다고"

경  찰 : "여보세요?"

신고자 : "예 예 배가 침몰된다구요"

경  찰 : "지금 어디에서,제주 들어오는 배에요?"

신고자 : "인천배 인천배 인천에서 제주도 들어오는거 지금 배가 예 지금 45도 기울어져 가지고"



8시 52분에 첫 구조 요청을 받아놓고도 정부는 58분에 사고를 접수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또 8분이 흐른 9시 6분.

세월호가 관할 해역에 진입한 이후 2시간 가까이 지나도록 아무런 교신도 하지 않던 진도 해상관제센터는 목포해경의 연락을 받고서야 사태를 파악한다.


9시 6분. 이 시각은 관매도 이장 고 씨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고 씨는 이 사람이 해경이나 군인,공무원은 아니라고 취재진에게 확인했다)에게 세월호 사고 관련 소식을 전해들은 시각보다 늦다. 진도관제센터는 세월호와 교신하지 않은 이유를 여전히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



3. 보여주기식 탁상행정 정부, 분노하는 실종자 가족 


9시 6분 이후라도 정부가 제대로 대처만 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주무 부처인 해수부의 종합상황실이 세월호와 관련해 처음으로 작성한 상황보고서 1보.


제목은 침수사고 보고, 침수로 경사 50도, 승선인원 현재까지 인명피해는 없다고 적혀 있다. 첫번째 조치 사항은 해경배 4척,함정 7척,헬기 3대 출동, 인근 유조선에 구조협조 요청,그리고  관련부서 전파였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은 전혀 볼 수 없다. 


2보에는 승선인원이 4명 늘어난 475명으로 바뀌었다. 11시 현재 475명중 140명을 구조, 인명피해 없음, 보험 현황 1인당 3억 5천이라고 적혀있다.


이 때는 세월호 선체가 전부 물에 잠겼을 때지만 제목은 여전히 침수보고. 1보 조치 사항과 비교하면 헬기 1대가 늘어났을 뿐이다. 해수부 장관의 해경청 방문예정도 중요 사안으로 기록돼 있다.


3보는 11시 20분 작성.


당시 세월호는 완전 침몰 상태였지만 제목은 여전히 침수보고. 역시 인명피해 없고 승선자 475명 중 161명 구조한 것으로 보고했다.


4보는 11시 50분그때야 제목을 침수,전복 사고로 바꿨다.


5보는 오후 1시477명 중 2명 사망, 350명을 구조했다고 보고했다. 일련의 상황보고를 보면 구조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6보는 오후 3시큰 혼란이 일어났다. 350명이라던 구조자가 164명으로 정정됐다.


이 시간 이후 사고 열흘째인 25일까지 구조자는 10명 늘어나는데 그쳤다.


도대체 정부는 지금까지 무엇을 한 것일까?





476명의 승객과 선원을 태운 대형 여객선이 서서히 기울어지면서 두 시간 가까이 구조를 기다리다 침몰했다.


근처에 살던 섬 사람들은 관의 협조 요청이 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전화를 걸고 마을 방송을 해서 한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정부는 신고를 받고 난 이후 지금까지 그야말로 우왕좌왕하며 무능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 사이 악몽같은 열흘이 지나면서 실종자 가족들은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과 절망에 짓눌리고 있다.




[서거차도 선장 인터뷰]

"저도 작년에 해난사고 당해서 그 분들 심정 누구보다 잘 알죠. 찾으면 참 다행이예요…

 비록 운명 달리했지만 부모 곁으로 와야 하잖아요. 못 찾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있어요. 저처럼…"


우리나라 헌법 제 7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