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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 N 주제별 보기/국정원 의혹 심층보도

‘말할 수 없고’, ‘기억나지 않는’ 이유



‘말할 수 없고’, ‘기억나지 않는’ 이유





서울경찰청은 왜 지난해 12월 16일 밤 서둘러 국정원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을까? 이번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그 의문을 풀 정황과 증언이 나왔다.


국정원 사건 국회 국정조사 증인청문회에서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지난 2012년 12월 12일 오후에 당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지 말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내사사건이므로 압수수색 영장은 적절하지 않다는 게 근거였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민주당이 김 씨를 경찰에 고발하면서 사건은 고발사건으로 성격이 변했다.


경찰은 본격 수사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고, 민주당이 제기한 김 씨의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수사하기 위해선 압수수색 영장 신청도 불가피한 상태였다.


그러자 김 씨는 다음날인 13일 오후 2시 노트북과 데스크톱을 자진해서 제출하기로 하고 오피스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임의제출 조건으로 ‘2012년 10월 1일 이후의 문재인, 박근혜 지지, 비방글에 한해서만 분석해달라’며 경찰에 분석범위를 제한해 요청한다. 사생활과 기밀 보호가 이유였다.


그런데 김 씨는 오피스텔에 머무는 동안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남아있던 주요데이터와 댓글 게시 흔적을 삭제했다는 사실이 서울청 증거분석팀 CCTV 녹화영상을 통해 밝혀졌다.


김 씨는 자신이 이미 증거를 삭제한 분석범위 안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분석범위를 한정하는 조건을 붙여 증거물을 임의제출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12월 11일 이후 오피스텔 안에서 하드디스크 자료를 삭제했느냐는 질문에 직원 김 씨는 ‘재정신청중인 상황이라 답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이 문제가 혐의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문제는 피고발자가 요청한 분석범위를 수사기관인 경찰이 끝까지 고수했다는 점이다.


서울청 증거분석팀은 분석 초기인 13일 저녁에는 분석방향을 잡아야한다면서 수서경찰서 수사팀에 키워드를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를 받고 태도가 바뀐다.


경찰청의 감찰자료를 보면 14일 서울청 수사2계장이 분석범위를 ‘10월 1일 이후 문재인,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비방글’에 한정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에 따라 키워드를 박근혜,문재인,새누리당,민주통합당 4개로 정한 것으로 나온다.


또 검찰 공소장에는 서울청 수사과장이 지시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서울청 수사부장, 수사과장, 수사2계장은 수시로 김용판 청장에게 직보하는 상황이었다.


분석범위를 피고발인인 김 씨와 국정원 측이 요구한대로 한정하는데 김용판 청장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청문회에 출석한 서울청 분석관들은 대법원판례를 예를 들며 피고발인이 요청한 증거분석범위를 지켜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증거분석범위는 혐의사실과 관련이 있는 부분에 엄격히 한정돼야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의 핵심이다. 분석범위가 피고발인의 자의적 요청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혐의사실과 관련이 있다면 분석범위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강제수사에 돌입할 수 있으며 이는 전적으로 수사팀의 판단에 따라야 하지만 당시 서울청은 이를 무시했다.


당시 12월 16일 김용판 청장은 국정원의 박원동 국장과 통화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또 전날인 12월 15일 4시간 넘게 청와대 부근 식당에서 이뤄졌던 점심식사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 점심식사’를 했던 12월 15일 밤부터, 서울청에서는 ‘2012년 10월 1일 이후 박근혜, 문재인 지지, 비방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디지털 증거분석팀이 분석을 종료한 시점은 12월 16일 밤 9시 15분이었다. 분석이 끝나기 무려 하루 전,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시점에 서울청은 이미 ‘댓글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는 증거다.


국정원은 분석범위 안에서 문제가 될 것이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청은 당시 사건의 수사책임자인 수서서 수사팀의 의견을 배제하고 이 국정원 측이 요구한 범위에 맞춰 분석을 진행했다.


경찰이 국정원과 모종의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면 분석이 끝나기도 전에 ‘댓글없음’으로 결론내렸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