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멘트>
사문화됐던 유신 학측이 40년 가까이 지난 요즘 대학가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잘 믿어지지 않으시죠? 그렇지만 사실입니다.
대학들은 유신시대 학칙을 근거로 학생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심지어 외부 인사 초청 강연까지 막고 있습니다.
최기훈 기자가 보도합니다.
<최기훈 기자>
대학 캠퍼스에도 봄이 왔습니다. 겨우내 무거웠던 학생들의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런데 덕성여대 교정에선 봄소식과 함께 구호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학칙이 웬말이냐. 유신학칙 부활 반대한다.”
총학생회가 주최한 외부인사 초청 강연행사를 학교측이 불허한데 대한 항의입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총학생회는 주말을 이용해 사흘동안 외부인사 12명을 초청해 진보2013이란 제목으로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습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노종면 해직 기자가 주요 강연자였습니다. 총학생회는 이런 계획을 지난 2월에 학교측에 알렸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행사를 일주일여 앞두고 학생처장 명의의 공문을 보내 행사를 불허했습니다. 이유는 학생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학칙을 위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강연행사가 정치행사로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덕성여대 학칙을 보니 실제로 학생의 정당가입과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정해놨습니다. 또 10인 이상의 집회와 학내광고, 인쇄물의 배부도 사전에 총장의 승인을 받게 돼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자기 학교의 학칙을 보여줘 봤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홍은진 / 유아교육학과] “학생들 개개인에 있어서 정치활동을 막는 거라면 학생들이 더 많이 알고, 전 잘 몰랐거든요.”
[이은서 / 국어국문학과] “저는 10인 이상의 집회를 학교에서 감시의 목적으로 참견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학교가 금지한 이번 강연은 지난해에도 열렸던 행사였습니다. 또 홍세화, 진중권 같은 진보인사는 물론 이명박 전 대통령과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서울시장 시절 이 학교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박노은 / 국어국문학과] “듣고 좀 어이가 없어요. 유신정권도 아니고 독재시대도 아니고 이렇게 모이는 것까지 그런 식으로 해야 하나 생각도 들고. 조금 있으면 도청까지 하겠어요, 이제.”
교수도 정치활동 금지 학칙에 어이없어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양만기 서양학과 교수] “학생도 마찬가지고 교수들도 마찬가지인데 그 (조)항이 있었던 걸 여태까지 저희들이 몰랐다는 것도 바보스러운 것 같고...”
취재진은 학교측의 입장을 들어보기 위해 학생처장실을 방문했습니다.
(무선으로라도 연락할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회의 중이신 걸로 알고 있어서...전화를 안받으시거든요.”
하지만 취재진은 본관에서 회의 중이라던 학생처장을 처장실 바로 아래 흡연구역에서 마주쳤습니다. 그런데
(처장님 잠깐만) “이거 놓으세요. 이거.” (왜 화를 내세요?) “왜 그러세요 정말.” (말씀 좀 듣고 싶어서 그래요. 왜 화를 내세요? 처장님이 공문을 내려보내셨잖아요. 저희가 학생들 얘기만 듣고 할 순 없잖습니까?) (아니 처장님 왜 피하세요? 정당하게 말씀하시면 되지. 안 찍을게요, 그러면.) “카메라 안 찍으면...”
학생처장은 법률적인 자문을 거쳐 학칙에 따랐을 뿐이라는 궁색한 답변을 내놨지만 공식인터뷰는 거부했습니다.
정당에 가입해 활동한다는 다른 대학 학생에게 덕성여대 학칙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김도윤 새누리당 청년정책위원(한국외대 4학년)] “저는 싸울 것 같아요 가서. 뭐 이건 구시대적인 건데, 수업거부를 하든 해가지고 그 학칙만큼은 바꿀 것 같아요. 그건 당연히 바꿔야 되는 거고요.”
학교측이 지금까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문화된 학칙을 꺼내든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학생들은 주장합니다. 사학비리문제로 퇴출됐다 지난해 복귀한 구 재단 측 총장에 대해 학생회가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석자은 덕성여대 부총학생회장] ”이 부분이 단순히 진보강연회 진보 인사가 오거나 정치적 색깔을 띄고 있어서 불허가 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학교 측이 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하고 있는 행동으로만 읽혀집니다.”
이런 상식 밖의 학칙은 비단 덕성여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 학교는 학생활동을 하든 인쇄물을 배포하든 모두 총장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습니다. 대자보도 학교 측의 승인이 있어야 붙일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총학생회 없이 1년을 보냈는데 당시 학생들은 학생회의 자치적인 운영에 학교측이 지나치게 간섭해 선거가 무산됐다며 반발했습니다.
이 때 문제가 됐던 것도 학칙입니다. 학사경고를 받거나 성적이 나쁜 학생은 회장 선거에 나갈 수 없도록 해놓았습니다. 학생자치기구 대표의 자격을 학교측이 정해놓은 겁니다.
[김새롬 / 성신여대 IT학부] “학칙에 그런 게 있어요. 대표자의 기준. 학사경고를 받지 않은자, 품행이 방정한 자. 이건 진짜 대표자는 그냥 학우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하고 싶은 사람이 나가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학우들이 뽑아주는 것이 기본적인 상식인데 성적으로 제한하고 뭘로 제한하고.”
지난 2011년 가을엔 광화문 한가운데서 대학생 한 명이 일 만 배를 한 뒤에 분신하겠다고 해서 한바탕 소동을 빚었습니다. 등록금인하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으려했을 뿐인데 학교측이 학칙 위반이라며 저지한게 발단이었습니다.
[김 모씨 / 목원대 학생] “사실 처음에 등록금인하도 아니라 요구사항 수렴을 위한 서명운동허가였거든요. 근데 뭐 서명운동 집회 같은 것도 안되고...정말 소수의 사람이 이렇게 다수의 집단하고 싸우는 게 힘든 일이구나 그런 느낌도 또 있었고.”
이렇게 학생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학칙들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유신정권 때 만들어진 학도호국단의 학칙입니다. 정치활동과 정당가입을 금지하는 것도, 집회와 간행물을 허가받게 하는 부분도 문구까지 오늘날의 학칙과 똑같습니다.
이같은 비민주적인 학칙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지난 2007년 헌법에 위배된다며 개정하거나 삭제하라고 대학측에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조사결과 국내 180개 대학가운데 3학교 가운데 하나 꼴로 정치활동을 금했고, 10개 가운데 7개 학교꼴로 언론과 출판,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학칙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은 성신여대 전 총학생회장] “가장 크게 문제라 하는 게 활동을 가로막고 게시판에 게시물이 떼어지고 이러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여론이 형성되기가 되게 어려운 부분이더라고요. 여론이 막혀버리는.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 우리학교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학생이 더 많은 거죠.”
국민의 눈과 입과 귀를 막았던 유신독재가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연덕연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 “대학도 결국 헌법이 교육권을 보장하면서 법률에 따라 설치 운영되는 기구이기 때문에 대학 학칙에 헌법에 위반되는 조항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학칙을 수십 년째 방치해 둔 채 글로벌 인재와 창조적 지식인을 양성하겠다는 대학들.
2013년 대한민국 상아탑의 자화상입니다.
뉴스타파 최기훈입니다. |